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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
  • 레오의 섬김과 공동체(광주매일칼럼 2024.4.10.)

  • 작성자 : 이*양 작성일 : 2024-04-11 조회수 : 44

레오의 섬김과 공동체

이계양(광주푸른꿈창작학교 교장)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또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또는 의지와 선택에 의해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유치원부터 학교, 지역사회와 사회단체 또는 직장 그리고 취미와 기호에 따라 각종 각양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 공동체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향약과 같은 규약을 통해 상부상조, ()의 정신 및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공동체 의식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라는 작품이 있다.

<동방순례>는 말 그대로 '동방'으로 가는 순례의 여행길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 공간이나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기도 하고 어디에도 없는 곳’, ‘영혼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즉 영혼의 고향이자 정신적 세계, 개인과 공동체의 이상이 실현된 곳, 궁극적인 도()이다. 따라서 소설 <동방순례>는 정신적 내면적 여행인 셈이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H.H(헤르만 헤세의 이니셜을 딴 명명으로 작가의 대리인)"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 위대한 것을 체험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결맹(Bund)에 가입하여 순례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 결맹 순례 참가자는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인 순례 목적을 가질 수 있었고 또 가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런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가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공동의 이상과 목적을 따르고 있고 또 공동의 깃발 아래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자신의 독자적이고 순진한 어린아이다운 꿈을 가장 내면적인 힘으로 또 궁극적인 위안으로 자기 가슴속에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순례 중 레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왔고, 때로는 사사로운 일을 맡아 하곤 했다. 또 단원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빨래하고, 즐거운 노래로 그들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불평과 하소연을 들어주고, 가야 할 방향을 안내,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동물들까지도 그를 따랐다.

단원들은 날마다 편안히 여행하면서도 그것이 레오의 섬김(봉사) 덕분임을 깨닫지 못했다. 어느 날 하인 레오가 모로비오 계곡쯤에서 사라진다. 단원들은 레오를 찾았으나 실패한다. 이제 단원들은 식사도 빨래도 직접 해야 했다. 피로를 풀어주던 노래, 휘파람 소리도 없는 삭막한 들판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단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사분오열하여 다투며 일상의 평온이 무너졌다. 급기야 순례를 포기하는 단원들이 생겨나고, 결국 순례는 끝나게 된다.

H.H도 그제야 레오가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순례단의 진정한 리더였음을 깨닫지만 회의에 빠져 순례단 결맹에서 낙오하게 된다.

그 후 H.H는 순례단(공동체)을 이탈한 죄로 심판장에 서게 된다. 심판관은 놀랍게도 레오였다. 레오는 순례단의 하인이 아니라 숨은 지도자였던 것이다. 결국 동방 순례의 대열 속에서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던 하인 레오가 무리의 최고 지도자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이야기다.

헤세는 작품을 H.H의 조각상과 레오의 조각상이 합쳐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아마 H.H가 레오에 의해 합일, 동일체, 구원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급속한 변화 속의 현대산업사회는 책임감의 결여와 이기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적자생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하고 소외와 배제와 불평등이 심화 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인류가 직면한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개인이건 국가건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에 목을 맨다는 점이다. 이 끝이 죽음이요 파멸, 공멸임을 알면서도 인류는 그 길로 매진하는 듯하여 안타깝고 슬프고 무섭다.

오늘도 인류는 <동방순례> 중이다. 자의건 타의건 너도나도 결맹 즉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순례단에서 하인 레오의 섬김을 통해 단원과 결맹 즉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음을 본다. 레오의 퇴장은 곧 섬김의 부재요 이는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지금 인류는 사라지는 레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기에 간절한 심정으로 레오의 섬김의 옷자락을 붙잡고 싶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신인 상부상조, ()의 정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상기해 보며 <동방순례> 중인 인류에게 지금 레오의 섬김을 새롭게 새겨본다.(광주매일신문 칼럼 202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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