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학교 이야기
  • 운동장가의 잡초(雜草)를 뽑으며

  • 작성자 : 이*양 작성일 : 2024-03-29 조회수 : 39

운동장가의 잡초(雜草)를 뽑으며

 

작년(2020) 8월 말.

처음으로 광주푸른꿈창작학교를 방문하였다. 학교에 들어서자 왼쪽에 운동장이 보였는데 운동장을 빙 둘러 가장자리엔 잡초(雜草)가 무성하였다. 어딘지 엉성하고 깔끔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왜 저걸 저렇게 놔두지?’ 생각했다.

그리고 91일부터 근무를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여 운동장 주변의 잡초를 3일에 걸쳐 말끔하게 뽑았다. 마치 갓 이발한 소년처럼 말끔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것이 금년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금년 봄이 되면서 아주 작은 풀싹들이 운동장가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무럭무럭 자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5월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눈에 두드러지며 잡초(雜草)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더 놔두면 작년 여름 끝 무렵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들어서며 보았던 그 너저분함이 다시 펼쳐질 것이 예상되었다. 사람을 동원하는 것도 쉽지 않고, 제초제를 사용하는 것은 더욱 안 되겠고. 여러 궁리 끝에 그래, 조금씩 뽑자. 나 혼자라도라고 생각하며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학교의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행정실의 황 선생님은 무리라며 안 된다며 말렸다.

만류를 뒤로 하고 틈나는 대로 오전에(더위를 피해) 1시간 정도씩 뽑아 보기로 하였다.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호미를 들고 운동장에 나섰다. 그리고 급식소에서 식재료를 다듬으면서 사용하는 엉덩이깔개방석(낚시 밭일 농사 작업할 때 사용하는)까지 빌렸다.

첫날은 요령을 모르고 엉덩이깔개방석을 거꾸로 끼고 앉아서 풀을 뽑으려니 몸도 불편하고 손에 익지도 않아 얼마 뽑지도 못하고 힘만 들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이미 반 이상은 한 거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겨우 방석을 제대로 낀 다음에라야 몸이 조금 나아졌지만 생각보다 일의 진척은 더뎠다. 소득이라면 시작했다는 사실과 엉덩이깔개를 제대로 착용할 줄 알게 된 것 정도였다.

두 번째 날에는 좀 요령이 생겨서 엉덩이깔개에 앉아서 하면 잠시 편하기는 하지만 이동 등 움직임이 둔하여 능률이 덜함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엉덩이깔개를 버리고 허리를 굽혀 더 적극적으로 뽑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첫날보다 더 많은 공간의 풀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운동을 빙 둘러서 있는 잡초를 모두 없애는 날이 있겠지. 그냥 꾸준히 하자. 하는 데까지 해 보자고 전의를 다지기까지 하였다.

세 번째 날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까지는 그냥 풀을 뽑아야 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뽑는 것 자체에 몰두하였다면 이제 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 풀 이름이 뭐지? 난 그냥 잡초(雜草)라고 부르지만 뭔가 이름이 있지 않을까?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래 이름이 있을 거야. 다만 내가 모를 뿐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온갖 상념들이 명멸하였다.

이 운동장의 잡초(雜草)들은 다 자기 나름의 이름이 있을 거야. 내가 모르면서 그냥 이름 없는 풀들 내지는 잡초(雜草)라고 뭉뚱그려 이름하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이름 없는 풀이라는 이유로, 잡초(雜草)라는 이유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니 너무 당연하게 뽑아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기고 전의를 다지며 땀을 흘리며 뽑아대고 있는 것 아닌가.

잡초(雜草)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면서 농작물 성장에 방해를 주는 풀이라고 사전에도 정의되어 있듯 쓸모없는 훼방꾼이요 방해물이니 인정사정없이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선 이름 없음이 무슨 죄인가? 아니, 왜 이름이 없는가? 이름이 없음이 아니라 내가 모를 뿐이다. 말하자면 내가 무식한 까닭이다. 명색이 대학원 박사 공부를 마쳤다고 식자연하면서도 운동장가의 풀에 대하여는 일자무식 그 자체인 것이다.

또 이 풀들이 정말 훼방꾼이요, 방해물들인가? 누구의 무슨 기준으로인가. 혹시 나 혹은 사람들의 기준으로 잡초(雜草)라고 하고 잡담(雜談.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 잡음(雜音, 불쾌한 느낌을 주는 시끄러운 소리), 착잡(錯雜, 갈피를 잡기 어렵게 뒤섞여 어수선함)과 같은 부류라고 싸잡는 것은 아닌가. ()섞일 잡이어서 잡지(雜誌, 특정한 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 내용의 글을 모아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편집, 간행하는 정기 간행물)같은 데도 쓰이지 않는가. 잡초(雜草)에 대한 개념의 주관적 편파성을 생각하니 그냥 뽑아버린다는 것에 대하여 미안함마져 든다. 나아가 잡초(雜草)가 약용으로 활용되는 경우에 생각이 미치자 미안함을 넘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다 최근 소개받은 전략가, 잡초(이나가키 히데히로 , 김소영 , 김진옥 , 더숲, 원제 : 雜草ルデラル)를 통해 잡초(雜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도 한 몫을 거들었다. 이 책은 잡초(雜草)바라지 않는 곳에 자라나는 식물로 정의하며 글을 시작하지만 잡초인지 아닌지는 우리 마음이 정하는 것이라고 새로운 정의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치 있는 것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발밑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치는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 그렇다. 잡초(雜草)를 뽑으면서 잡초(雜草)처럼 살아온 나, 잡초(雜草)처럼 살고있는 나, 잡초(雜草)처럼 살아갈 나를 만난다. 아니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잡초(雜草)처럼 살고 있다.

광주푸른꿈창작학교의 운동장가에 난 잡초(雜草)를 뽑으면서 나와 우리의 살아가는 것이 잡초(雜草)와 같은 것이라면 푸른꿈창작학교 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를 생각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는 말은 나와 우리 푸른꿈창작학교 공동체에 새로운 희망이요, 지혜요, 용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작한 풀뽑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이름 모를 풀들을 뽑는 일을 진행하면서 인류의 생명 역사와 함께 생존해 온 잡초(雜草)의 잡초(雜草)다움, 연약함의 강함, 변화된 환경에 따르는 적응력, 플랜B를 준비하는 생존전략, 새로운 곳을 찾는 번식력, 넘버원이면서 온리원인 잡초성(雜草性) 등을 음미하며 즐기게 되리라.

풀뽑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내 즐거움도 잡초(雜草)와 함께 끝이 없으리라.

푸른꿈창작학교의 즐거움도 또한 이 잡초(雜草)와 함께 영원하리라.

 

 

 

  • 이전글 다음글 수정 삭제
  • 글쓰기 목록